장르: 다큐멘터리, 드라마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출연: 파하드 케라만드, 부바 바이요르
영화의 배경과 줄거리
영화는 1990년 6월 21일 이란 북부 지역에서 일어난 대지진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테헤란 북서쪽 200km 지점을 진앙지로 하여 규모 7.7의 강진이 발생하였으며 12시간 후에 규모 6.5의 여진이 다시 발생하여 피해규모가 커졌다. 이 지진으로 1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카스피해로 통하는 주요 고속도로가 지속적인 산사태로 인해 봉쇄되었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에서 시작되어 <올리브 나무 사이로>(1994)까지 이어지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지그재그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이다. 영화는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오가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1990년 이란 북부지역에 대지진이 발생하자 자신의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 주인공으로 출연하였던 두 소년이 걱정된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어린 아들 푸야와 함께 아이들을 찾으러 길을 떠난다. 테헤란 시 외곽의 톨게이트. 라디오에선 끊임없이 지진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길고 긴 터널을 지나고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지진으로 인한 참상은 또렷해진다. 산사태로 길은 망가지고 운전을 하는 것도 쉽지 않다. 코케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배경이 되었던 마을이다. 소박하고 정겨운 시골 마을의 풍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무너진 건물들과 잔해 속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쓴 사람들은 무표정하다.
아이들이 살고 있는 코케로 가는 고속도로가 막히자 감독은 마을로 가는 샛길로 들어선다. 이들은 길을 찾아 인근 마을을 헤매면서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계속되는 삶
마을로 들어선 감독과 푸야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서 할아버지 역으로 출연했던 루히 씨를 우연히 만난다. 루히 씨의 집을 방문한 두 사람은 폐허 속에서도 복구 작업이 한창인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한다.
산다는 건 뭘까. 두 사람이 스치듯 만나는 사람들은 울지 않는다. 너무 많이 울어서 눈물은 이미 메마르고 이들은 이제 살아야 한다. 끔찍한 폐허 속에서도 사람들은 일상을 보낸다. 아이들은 장난을 치고, 그런 아이들을 혼내고, 결혼을 하고, 축구경기를 보기 위해 안테나를 설치한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신은 왜 우리를 버렸을까? 사람들은 원망하지 않는다. 대신 친척들이 모두 죽었다고 울먹이면서도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덧붙인다. 재난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또 하루를 살아내는 것뿐이다.
영화는 재난지역의 생생한 현장음으로 가득하다. 가장 먼저 들어오는 소리는 라디오다. 보여주진 않지만 보급품을 나르는 듯한 헬리콥터 소리, 육중한 트럭이 굴러가는 소리,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와 같이 재난의 소리는 끊임없이 영화를 채운다. 하지만 놀랍게도 생명의 소리는 늘 잔인한 소리 사이에 존재한다. 아기 울음소리, 새소리, 돼지 울음소리, 닭이 우는 소리. 그리고 잔해를 치우고 먼지를 털고 빨래를 하는 등 삶을 재건하는 소리.
특히 비극적인 재해에도 불구하고 해맑은 아이들의 모습은 일상의 회복을 갈망하게 만든다. 관찰자로 순수한 아이 후야를 등장시키는 것도 어떤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것들을 제쳐두고 재난에 대처하는 가장 순수하고 본능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려던 것은 아닐까?
아름다운 마지막 장면
영화는 대체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움직이는 차 안에서 창밖을 보는 시점 쇼트가 많다. 다만 중간중간 익스트림롱쇼트를 보여주는데 점처럼 움직이는 감독의 노란색 차와 대비되는 광활한 자연은 굉장히 압도적이다. 끊어진 길이 열리면 끊어졌던 삶도 다시 시작된다. 사람들은 짐을 짊어지고 다시 길을 걷는다.
감독은 난민촌에서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 나왔었던 초록색 눈동자의 소년 모하메드를 만난다. 사람들은 감독의 낡고 작은 차로는 경사가 심한 코케까지 가기 어려울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감독은 후야를 모하메드에게 맡기고 홀로 코케로 향한다.
8분여간의 롱테이크로 촬영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가파른 언덕으로 난 길을 익스트림롱쇼트로 촬영했다. 주인공의 노란색 차는 가파른 길을 올라가다가 힘에 부쳐 미끄러지기를 반복한다. 이때 조금 전 지나쳤던 무거운 짐을 진 청년이 풀숲에 박힌 차를 길까지 밀어 올려 준다. 그리고 청년은 묵묵히 무거운 짐을 다시 짊어지고 고갯길을 올라간다. 멀리 언덕 위에는 감독이 찾고 있는 소년들로 보이는 두 소년이 걸어가고 있다.
나는 아이들의 안부를 확인한 감독의 차가 그냥 돌아가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화면 밖으로 사라졌던 차는 다시 방향을 틀어 청년이 올라가고 있는 고갯길을 향해 달린다. 그리고 잠시 멈춰서 청년을 태운 후 경쾌한 비발디의 호른 콘체르토에 맞춰 구불구불 계속되는 경사가 심한 언덕길을 힘차게 달려 올라간다.
길은 끊임없이 걸어야 하는 인간의 고된 삶이 녹아있다. 때론 끊어지고, 때론 너무 가파른 길이라도 사람들은 그저 묵묵히 서로 도우면서 올라갈 뿐이다.
좋은 영화를 느닷없이 만났을 땐 기분이 좋다. 삶이 늘 즐겁지 않아도 영화를 보는 일상은 나를 또 움직이게 한다. 삶과 영화의 경계에서 아름다웠던 영화...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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