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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남한산성(2017): 굴욕의 역사를 재연하다

by N이와이 2022.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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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사극, 드라마

감독/각본: 황동혁

출연: 이병헌, 김윤석, 박해일, 고수, 박휘순

 

역사적 배경과 등장인물

17세기 초(인조 14년),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명과 대립하던 여진은 국호를 청으로 정하고 조선에게 신하의 나라가 될 것을 강요한다. 조선은 민족의 자존과 명과의 의리를 내세워 청에게 저항한다. 1636년 겨울, 청의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들이닥친다. 인조와 신하들은 강화도로 가는 피난길이 막히자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한다. 추위와 굶주림, 절대적인 군사적 열세 속에서 남한산성은 청군에 의해 포위되고 온 나라는 쑥대밭이 된다. 대신들은 제 몸의 안위와 형식적인 대의명분만을 중요하게 여기며 오랑캐인 청나라에 무릎 꿇는 것을 반대한다. 치욕을 견디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항복해야 한다는 '이조판서' 최명길과 청의 치욕스러운 공격에 끝까지 맞서 대의를 지켜야 한다는 '예조판서' 김상헌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 사이에서 인조의 번민은 깊어지고 청의 무리한 요구와 압박은 더욱 거세진다.

 

남한산성은 한국사에서 왕이 오랑캐에게 직접 머리를 조아린 굴욕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삼전도의 굴욕). 왜 꼭 '병자호란'이었어야 했을까? 역사 교과서에서도 자세히 다루지 않는 몇 줄의 부끄러운 역사를 작가는 왜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처음 이 작품을 읽기 두려웠던 이유는 학생 시절 고난의 역사를 공부했던 순간의 곤욕스러움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패배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것은 늘 어렵고 불편하다. 그럼에도 남한산성은 과거를 들여다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했던 인물과 시대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제시한다.

 

최명길(이병헌): 최명길은 조선이 청나라와 전쟁을 해도 이길 힘이 없다는 현실을 인지하고, 오명과 역적이라는 짐을 짊어지면서도 나라와 백성을 위해 화친을 주장한다.

김상헌(김윤석): 김상헌은 명분을 우선하고 선악의 명백함을 주장하던 인물로 청나라와의 외교에서 타협을 거부하는 강경파다. 항복이 결정되자 목을 매 자살 시도를 한다. 이후 충절과 절개의 화신으로 남아 조선 말기까지 존경받았다. 

인조(박해일): 조선의 제16대 임금.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의병의 지원을 바라면서 40일 동안 농성했으나, 각지의 군마저 청군에게 괴멸되어 희망이 없자, 결국 항복하여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의 예를 취하고 군신의 의를 맺는 굴욕을 당한다.

서날쇠(고수): 서날쇠의 모티브가 된 실존인물은 인조를 남한산성까지 업어다 준 대장장이 서흔남으로 여겨진다. 서흔남은 입성해서도 전령으로 적진을 누비며 목숨 걸고 맹활약했고, 전투에도 참여하여 청군 3명을 죽이기도 하였다. 삶의 의지를 지닌 강인한 민중을 상징한다. 

 

 

원작 소설 남한산성

김훈은 공간을 묘사하는 데 있어 탁월하다. 다만 묘사의 디테일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남한산성은 각 문장의 문체가 주는 맛을 음미하기보다는 독립된 문장들이 엉켜 기어이 하나의 공간이 되어버리는 독특한 경험을 하게 한다. 공간은 독립되어있지 않고 이어져 있으며 공유되고 흡수한다. 익숙하여 흥미를 잃어버린 남한산성이라는 공간을 글이라는 재료를 통해 재창조함으로써 그곳에 자리한 인물들과 사물들에까지 숨을 불어넣는다. 남한산성이라는 이 거대하고 정적인 공간이 하나의 숨 쉬는 생명체로 느껴진 것은 그래서였겠지. 찬 입김을 불어대며 잔뜩 웅크린 짐승처럼.

 

소설 남한산성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남한산성이라는 공간적 이미지로 흡수했다. 굳게 닫힌 성문 안에는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이 공존했고, 주화를 주장하는 최명길도 척화를 주장하는 김상헌도 그저 산성에 있었던 임금도 다르지 않았다. 나라의 운명과 사대부들의 신념은 남한산성이라는 거대한 공간 속에서 의미 없이 밀려다닐 뿐, 시간이 흐르면 민중들은 이 척박한 땅에 한 줌의 씨를 뿌릴 것이었다.

 

 

영화 남한산성 (2017)

그러면 압도적인 공간의 이미지가 영화에서는 어떻게 구현될까. 좋아했던 소설이 원작인 경우 영상화된 작품을 잘 챙겨보지 않는 편이다. 영상화 작업이 내 안에서 이미 온전한 세계관을 훼손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글로 만들어낸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를 영화는 제대로 구현할 수 있을까? 작품에 전반적으로 짙게 배인 고독과 허무주의를 어떻게 표현할까.

 

영화는 소설처럼 차갑고 느렸다. 남한산성은 추위에 웅크린 짐승 같았고 그 주변엔 짐승이 토해낸 숨이 차갑게 얼어 있었다. 내가 그려놓은 세계에 차갑고 바스락한 색이 입혀지는 느낌이었다. 

전쟁영화이지만 대규모 전쟁 장면도 화려한 액션씬도 없는 너무나도 문학적인 이 영화에 스펙터클한 몰입감을 주는 것은 두 주연배우의 연기다. 가슴속에 터질 듯한 신념을 가진 두 사람의 읍소는 서로를 보고 있지 않아도 날카롭고 사랑을 갈구하는 듯 절절했다. 처연한 듯 차갑고 슬픈 듯 타오르는 두 배우의 연기는 역사 속의 가장 첨예한 대립을 오롯이 재연한다. 

 

두 사람 중 누가 옳은가? 그들의 신념과 목숨을 건 논쟁은 쓰러져가는 백성과 기울어가는 나라 앞에서 곧 사라질 눈발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자신의 자리를 우직하게 지킨 자들이다. 각자의 신념과 가치를 통해 나라를 생각했으나 목적지까지 가는 길이 달랐을 뿐이다. 누가 그들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을까?

담백하고 절제된 영화의 톤은 패배의 역사를 비난하기보다는 조용히 응시한다. 그 묵묵한 응시가 나는 슬프고 또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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