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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라쇼몽(1950): 같은 사건, 주관적 진실

by N이와이 2022.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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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드라마, 범죄, 미스터리

감독/각본: 구로사와 아키라

출연: 미후네 토시로, 쿄 마치코, 모리 마사유키, 시무라 타카시, 치아키 미노루, 우에다 키치지로

 

사건이 벌어진 배경

헤이안 시대, '라쇼몽'이라는 간판이 달린 다 쓰러져가는 건물. 억수 같은 비가 내리고 건물 아래 나무꾼과 스님이 쭈그리고 앉아 '모르겠다'며 중얼거린다. 비를 피해 처마 밑으로 뛰어들어온 행인은 두 사람의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한다. 이들은 얼마 전 마을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의 전말을 풀어놓는다.

 

사흘 전, 녹음이 우거진 숲. 사무라이 타케히로가 자신의 아내 마사코를 말에 태우고 산길을 지나가고 있다. 그늘 속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도적 다조마루는 마사코의 예쁜 얼굴을 보고 그를 차지할 욕심에 속임수를 써서 타케히로를 포박하고, 마사코를 겁탈한다. 나무를 하러 산을 오르던 나무꾼은 사무라이 타케히로의 가슴에 단검이 꽂혀있는 것을 발견하고 관청에 신고한다. 

오늘 관청에서, 체포된 다조마루와 마사코의 심문이 벌어진다. 

 

나무꾼의 증언: 나무꾼은 여자의 모자, 사무라이의 모자, 끊어진 밧줄과 사무라이의 시체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이야기한다.

스님의 증언: 산길을 걷던 중 말에 탄 사무라이 부인과 그 옆에서 걷는 사무라이의 곁을 스쳐간 일을 이야기하고 인간 목숨의 덧없음을 한탄한다.

다조마루를 잡아온 남자의 증언: 말에서 떨어져 뒹굴고 있던 악명 높은 도적 다조마루를 잡아 관청으로 온다. 도적은 살해된 사무라이의 칼과 말을 가지고 있었다.  

 

 

 

엇갈리는 세 사람의 증언

도적 다조마루의 증언: 다조마루는 나무 밑에서 낮잠을 자던 중 지나가는 사무라이 부인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사무라이를 죽일 생각은 없었던 도적은 여자를 얻기 위해 사무라이를 유인해 밧줄로 묶어 놓고, 단도를 들고 저항하는 사무라이 부인을 겁탈한다. 사무라이 부인은 정숙한 얼굴에 가려진 추한 욕망을 드러내고, 두 사람 중 한 명은 죽어야 한다며 싸움을 부추긴다. 도적은 사무라이의 밧줄을 풀어주고 당당하게 결투를 벌인 끝에 사무라이는 도적의 칼에 죽는다. 도적의 말에 따르면 결투는 대단했고 자신의 칼을 23번이나 받아낸 사무라이는 끝까지 남자다웠다. 하지만 결투가 끝났을 때 사무라이 부인은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사무라이 부인의 증언: 절에 숨어 지내다가 관청에 끌려온 사무라이 부인은 울부짖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도적에게 강간당한 직후, 도적은 달아난다. 남편을 돌아보지만 사무라이의 얼굴은 싸늘하기 그지없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자신을 경멸하는 남편을 참을 수 없었던 사무라이 부인은 자신의 단도를 들고 죽여달라며 소리를 지르다가 실신한다. 정신이 들었을 때 남편은 이미 가슴에 단도를 꽂은 채 죽어있다. 너무 두려워 그 길로 그녀는 줄행랑을 치고 여러 번 죽으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사무라이의 증언: 죽은 사무라이의 증언은 무당에 빙의하여 이루어진다. 아내를 겁탈한 후 도적은 아내를 설득해 같이 도망치려 한다. 아내는 황홀한 얼굴로 이를 승낙하고, 도적에게 남편을 죽이라고 다그친다.  마사코의 태도에 충격을 받은 도적은 사무라이에게 여자를 죽일지 살릴지 선택하게 한다. 사무라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내는 도망가버린다. 아내를 찾지 못하고 돌아온 다조마루가 자신을 풀어주자 사무라이는 자신을 옹호해준 도적을 마음속으로 용서하고, 배신감과 자괴감을 이기지 못한 채 결국 아내의 단도로 자결한다.

 

 

 

진실과 결말

나무꾼은 이야기를 끝내고 이 모든 증언들은 거짓이라고 말한다. 관아에서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던 건 사건에 얽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여자의 모자를 따라간 나무꾼은 사무라이의 시체가 아닌, 사무라이 부인에게 애원하고 있는 도적과 묶여있는 사무라이를 발견하고 이를 숨어서 지켜본다. 

 

나무꾼이 본 진실:  도적은 마사코를 겁탈한 후 온갖 감언이설로 여자를 설득한다. 울던 여자는 단도로 남편의 밧줄을 끊고 남자들의 결투를 부추긴다. 하지만 사무라이는 이런 여자 때문에 목숨을 걸 수 없다며 겁탈 직후 자결하지 않은 아내를 경멸하고 버린다. 도적 역시 사무라이에 동조하여 떠나려고 한다. 두 남자에게 모두 버림받자 서럽게 울던 사무라이 부인은 곧 분노에 차 남자들을 비난하고 이간한다. 여자의 도발에 이끌려 억지로 칼을 드는 두 남자. 칼을 든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혼자 넘어져 허둥대거나 서로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등 개싸움을 벌인다. 도적의 증언과는 달리 당당하지도 훌륭하지도 않은 졸전 끝에, 사무라이는 죽고 사무라이 부인은 도망친다.

 

비는 여전히 억수같이 퍼붓고 나무꾼은 이야기를 마친다. 나무꾼과 스님 모두 인간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지만, 행인은 인간과 이 세상은 이미 이런 일은 다반사라며 비웃는다. 그때 문 뒤쪽에서 버려진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행인은 버려진 아이를 감싸고 있던 비단옷을 가져가려고 하고, 나무꾼과 스님은 그 일의 부당성에 대해 항의한다. 행인은 현장에서 사라진 단검의 행방을 언급하며 여자의 단검을 훔친 나무꾼이야말로 이기적이라면서 비난한다. 나무꾼이 해명하지 못하자 행인은 아기의 옷을 챙겨 유유히 떠난다.

비는 조금씩 잦아든다. 나무꾼은 아기를 안고 가려 하지만 이를 수상히 여긴 스님이 제지한다. 나무꾼은 스님에게 자신이 이 아이를 키울 거라고 이야기하고 자신이 단검을 훔친 일에 대해 통렬한 자기비판을 보여준다. 스님은 덕분에 인간에 대한 믿음을 다시 찾게 되었다며 고마워한다. 

 

 

 

라쇼몽의 영화적 가치와 감상

라쇼몽은 1951년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으며 구로사와 아키라를 세계적인 거장으로 만들어준 영화다. 플래시백이라는 영화 기법을 캐릭터의 주관적인 스토리를 들려주는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물들이 자신의 시점에서 사건을 보여주거나, 혹은 추후에 사건을 회상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진실에 근접해 가는 연출인 '라쇼몽 기법' 이 이 영화로부터 시작됐다. 라쇼몽 기법은 주관적 관점에 따라 한 가지 사실이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객관적 진실이란 무엇인가. 'A'라는 사건은 저마다의 입장과 이해관계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사건이 되기도 한다. 객관적 자료는 객관적이지 않고, 객관을 주장하는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중심적일 뿐만 아니라 사건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구성하는 능력에도 한계가 있다. 주관이 개입하지 않은 객관적 진실이라는 게 가능할까?

라쇼몽은 진실에 접근하는 인간 각자의 결함을 보여준다. 이유는 다양하다. 다조마루는 '남자다운 도적 다조마루'라는 명성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싶지 않고, 사무라이 부인은 정절, 사무라이는 직업적 명예를 지키고 싶어 한다. 이러한 외적 가치가 욕정, 질투, 경멸, 배신감, 살고 싶은 욕망, 처벌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개인적인 욕망과 부딪히면서 진실은 왜곡된다. 그렇다면 최종 목격자인 나무꾼의 말은 진실일까? 그 역시 단검을 훔쳤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위증했고, 때문에 객관적 진실은 없다는 영화의 주장에 폭발적인 힘이 실린다. 

 

이 영화는 진실 찾기에 대한 영화는 아니다. 반전을 위한 영화도 아니다. 그보단 우리가 이야기하는 진실의 덧없음과 인간 본성에 대한 절망이 축축하게 배어 있다. 시커먼 비가 쏟아지는 라쇼몽(나생문)은 한때 수도로 통하는 정문이었으나 전란이 계속되던 헤이안 시대에는 시체가 쌓이는 죽음의 공간이었다. 이러한 배경 앞에서 진행되는 진실 없는 진실 찾기란 허무하기 짝이 없다. (다만 진실을 왜곡했던 사람 중 하나인 나무꾼이 자기반성을 통해 아기를 끌어안는 결말은 미약하지만 인간성 회복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기도 한다.)

 

진실은 언제나 무너지지만, 진실을 향한 날카로운 '라쇼몽'의 시각은 인간과 세대를 관통하여 무시할 수 없는 질문을 남긴다. 세상에 나온 지 70년이 지난 영화를 지금도 꺼내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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