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드라마, 로맨스
감독: 야마시타 노부히로
출연: 카호, 오카다 마사키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은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다. 다시 오지 않을 그 시절의 향수와, 어쩌면 잊고 있었던 작지만 빛났던 기억의 한 조각들이 뭉근하게 차오른다. 왜 지나가는 것들은 그처럼 아름다울까.
따뜻한 봄날 같은 시골마을
전교생이 6명인 시골 분교. 초등학교 1학년인 사치코, 3학년 카츠요, 6학년 코타로와 중학교 1학년인 이부키와 아츠코, 2학년인 소요가 그들이다. 소요는 유일한 상급생으로서 아이들을 돌보느라 언제나 분주하다. 그러던 어느 날 도쿄에서 소요와 같은 2학년인 히로미 오오사와가 전학을 온다. 소요는 키가 크고 잘생긴 전학생의 등장에 설레지만 조금은 도도한 히로미와 친해지기가 쉽지만은 않다.
매미소리 요란한 어느 여름날. 가까운 바닷가로 놀러 가던 7명의 아이들 앞에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 길은 5년 전 추락사고가 있은 이후로 마을 아이들이 피해 다니던 길이다. 하지만 히로미는 그 길로 가겠다며 앞장서 가버리고 망설이던 여섯 명은 히로미를 따라 5년 만에 그 길을 걷는다. 추락사고가 있었던 다리를 건너던 여섯 명은 유령이 보인다는 사치코의 말에 미친 듯이 뛰고, 소요는 기찻길에서 넘어지고 만다. 기차가 오는 것을 본 소요는 유령이 내 다리를 잡고 있다며 비명을 지르고, 달려온 히로미는 소요를 구해준다. 바닷가에서 돌아오는 길에 두 사람은 다시 그 다리를 지나가는데 사람이 뛰어내렸다던 그 자리엔 히로미가 가져다 놓은 도라지 꽃 몇 송이가 놓여있다. 소요는 민들레 꽃을 꺾어 묵념하고, 두 사람은 그 사건을 계기로 친해진다.
영화는 소요와 히로미의 풋풋한 첫사랑을 중심으로 오줌싸배기 사치코, 신사의 축제, 밸런타인데이 등 시골 마을의 작은 일상을 사랑스럽게 보여준다. 아이들은 그리 대단하진 않지만 감수성이 풍부하고 서투른 시절에 할 법한 고민들을 가지고 있다. 특히 소요는 이런 성장통이 가장 두드러지는 인물이다. 아빠가 바람을 피우는 것은 아닐까. 사치코가 나를 원망하진 않을까. 코타로가 서운해하지는 않을까. 축제에서 말실수를 한 소요가 어색해진 분위기에 어쩔 줄 몰라하는 장면이나 미안함과 서러운 마음 등이 복합적으로 터질 때의 감정은 그 나이에 경험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들이어서 오히려 마음이 따뜻해진다.
마을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목조주택과 논, 시골길, 그리고 계절에 따라 피는 꽃들. 아이들은 산울림을 들으며 자연과 교감하고 그들만의 언어로 화해하고 성장한다.
추억은 뭉게뭉게
소요는 누구보다 추억을 소중하게 여기는 캐릭터다. 영화의 시점이 어른이 된 소요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시점이 아니라 아직도 그 시절을 통과하고 있는 사춘기 소요의 시점이라는 것을 볼 때, 지금 내 옆에 존재하는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소요는 이 영화를 더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추억에 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다. 중학교 3학년이 된 소요와 히로미는 수학여행을 간 도쿄에서 히로미의 도쿄 친구들을 만난다. 이들은 헤어지면서 학교가 재건축된다며 철거된 건물 벽돌을 히로미에게 선물한다. 히로미는 친구들의 장난이라며 의미 없는 돌덩어리를 버리고 가지만 몰래 돌덩어리를 챙긴 소요는 크고 무거운 벽돌을 메고 다니다가 실신한다. 내 추억도 아닌 히로미의 추억까지 소중하게 여기고 지켜주려는 소요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에피소드다.
시간이 흐르고,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소요와 히로미는 지역에 있는 고등학교인 모리고 합격 통지서를 받는다. 히로미가 도쿄가 아닌 이곳에 남기를 결정한 사실은 영화의 아름다움에 서정성을 더한다. 모두가 졸업해버리면 학교는 어떻게 되는 걸까. 땅거미가 지는 어스레한 어둠 속에서 학교의 게시판, 벽, 칠판 등등을 하나하나 손으로 쓰다듬는 소요. 정든 교실의 뒷모습까지 눈에 박으려는 듯. 안녕. 또 올게.
영화는 사소하지만 빛나는 순간들로 가득하다. 사츠키의 순간, 아츠코의 순간, 히로미의 순간, 그리고 소요의 순간들. 이 순간들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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