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로맨스
감독: 김용균
출연: 김희선, 주진모, 조승우, 최강희
와니와 준하는 바람이 땀을 식혀주는 싱그러운 여름날 나무 그늘 아래에서 보고 싶은 영화다. 매미소리가 영화의 소리를 조금 방해해도 좋다. 여름의 풍경과 여름의 소리는 어느새 영화의 일부분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조금 아프지만 결국 사랑이라는 감정을 섬세하게 담은 와니와 준하는 순정만화를 보는 듯 따뜻하고 서정적이다. 실제로 애니메이션이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에 삽입되어 영화의 동화적인 감수성을 극대화시킨다.
와니와 준하
여름. 춘천의 2층 주택 와니의 집.
스물여섯 살 와니는 현재 6년 차 동화부 애니메이터다. 늘 시간에 쫓기는 동화부에서 원화부로 옮기는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어 얼핏 차가워 보이지만 표현이 서투를 뿐 여리고 배려심이 깊다. 스물일곱 살 준하는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다. 춘천에 있는 와니의 집에서 동거하면서 첫 장편 시나리오를 작업 중이다. 다정하고 장난기가 많은 준하는 와니를 세심하게 챙긴다.
2층에는 와니의 동생, 영민의 방이 있다. 준하는 영민의 방이 궁금하지만 와니는 언제나 그 방에 단단하게 자물쇠를 걸어놓는다. 그러던 어느 날, 외국에 있던 영민이 귀국한다는 전화가 걸려오고, 어린 시절 같이 어울렸던 소양이 와니의 집에 오면서 담담했던 와니의 마음에 균열이 생긴다.
와니와 영민 그리고 소수자들의 이야기
영민은 와니의 한 살 어린 이복동생이다. 와니와 영민은 이복남매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사이가 좋다. 고등학생이던 와니와 영민 그리고 소양은 함께 어울리며 풋풋한 학창 시절을 보낸다.
영민이 와니의 눈썹을 그려주다가 키스하는 장면은 아찔한 첫 키스의 경험만큼이나 오래 기억될 장면이다. 불가항력적으로 끌리는 서로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이 일순간 팽팽해진 분위기 속에서 조용히 동요한다. 이복남매의 금기된 사랑은 순수한 첫사랑이라는 감정에 더해 기폭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파도가 쳤을 이들의 감정을 전시하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을 생략하거나 절제하는데 그래서 과거의 어떤 사건이 드러났을 때 와니와 영민이 감당해야 했을 고통의 무게가 뒤늦게 밀물처럼 밀려온다. 와니와 영민은 어렸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다루는 데에 서툴렀기 때문에 이들의 간절했던 선택은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이 영화의 첫사랑은 너무 아름답지만 너무 위험하고 그래서 더 아릿한 사랑의 향기를 남긴다. 첫사랑은 원래 아픈 거야...라는 흔한 위로의 말보다 그들의 위험한 첫사랑을 가만히 쓰다듬어주는 영화의 손길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건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소수자들에 대한 시선과도 맞닿아 있다.
와니와 준하는 순정영화라는 틀을 가지고 있지만 와니의 첫사랑은 근친 간의 사랑이며 유능한 애니메이터인 와니의 선배는 동성을 사랑하는 성소수자로 등장한다. 당시 근친, 동성애와 같은 소재를 다루었던 대부분의 영화가 어둡고 퇴폐적인 성향의 영화였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런 말랑말랑하고 아련한 동화 같은 이야기 속에 소수자들의 이야기들을 엮은 것은 흔치 않은 시도였다. 뒷골목 같은 일상적이지 않은 배경이 아닌, 비장애인과 장애인, 성소수자들이 자연스럽게 사회를 형성하고 사랑하고 일상을 보내는 장면들은 그래서 더 인상적이다. 와니와 영민의 첫사랑은 영화의 이런 감수성 안에서 꽃을 피운 결과물이다.
다시 와니와 준하
와니는 일련의 일들로 촉발된 아픈 첫사랑의 기억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낸다. 와니에게 준하는 어쩌면 강렬했던 첫사랑을 잊게 해주는 편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편안하다는 건 강렬한 자극 앞에서는 존재감을 잃는다. 와니 앞에서 '준하'라는 존재가 지워진 준하는 더 이상 와니 옆에 있을 수가 없다. 준하는 와니를 떠나 서울 집으로 돌아온다.
준하가 떠난 자리에 혼자 남은 와니는 어땠을까. 준하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크다. 아니, 그건 빈자리로 설명할 수 없다. 와니의 일상에 흘러들어온 준하는 와니의 공간 구석구석에 자신의 존재감을 심는다. 준하는 떠났지만 와니의 집은 이미 준하로 가득하다. 와니가 냉장고에 붙은 포스트잇을 보면서 오열하는 장면은 와니의 내면에 잠재되어있던 슬픔이 비로소 터지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그 자리를 다시 준하로 채우는 장면이기도 하다.
와니와 준하는 수채화 같은 사랑을 한다. 튀지 않지만 서서히 물드는 사랑. 포용력이 강해서 주변을 곱게 물들이는 사랑. 일상의 파고를 담담하게 그리던 영화는 엔딩에서 와니와 준하의 서사를 동화적인 감수성으로 완성한다. 와니와 준하는 다양한 사랑의 방식을 응원하고 순수한 사랑의 힘을 믿는 영화처럼 보인다. 조금 지나치게 운명론적이라고 해도 여전히 나는 이런 사랑을 믿고 싶은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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