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드라마, 로맨스, 퀴어
감독: 임대형
출연: 김희애, 나카무라 유코, 김소혜, 성유빈
'윤희에게'는 서정적인 수필 한 편을 읽은 듯한 여운이 남는 영화다. 아니 어쩌면 한 장의 사진을 본 것 같기도 하고 소박한 동양화를 본 것도 같다. 침묵과 여백으로 감성을 심고 눈이 녹듯이 천천히 마음으로 스며드는 이야기.
쥰의 편지
눈이 소복이 쌓인 마을. 마사코는 쥰의 방에서 부치지 못한 편지를 발견하고 그 편지를 몰래 우체통에 넣는다.
윤희에게. 잘 지내니?
학창 시절을 한국에서 보낸 쥰은 한국인 엄마와 일본인 아빠가 이혼할 때 아빠를 따라 일본으로 온다. 쥰에게 무심했던 아빠와 떨어져 줄곧 고모랑 살아온 쥰은 아빠의 장례식을 치르고 윤희에게 편지를 쓴다.
오타루. 쥰은 윤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겨울의 오타루는 눈과 달, 밤과 고요뿐이라고 말한다. 고모와 쥰, 그리고 윤희는 오타루와 닮은 사람들이다. 오타루는 겨울이면 엄청난 눈이 내린다. 고모인 마사코는 입버릇처럼 눈이 언제나 그치려나.. 하고 중얼거리지만 고모와 쥰은 이 눈이 그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치워도 치워도 계속 쌓이는 눈처럼 지워도 지워도 계속 쌓이는 그리움. 쥰은 윤희의 꿈을 꾼다고 말한다. 그럴 때면 쥰은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쓴다. 영화는 그리움이라는 정서로 가득 차 있다. 사실 편지라는 매개체는 그리움이라는 정서를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한 자 한 자 눌러쓴 이름과 안부인사 그리고 추신까지. 오롯이 그 한 사람만을 생각하는 시간. 그리고 그리운 마음 한편에는 외로움이 있다.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외롭다. 급식소에서 일하는 윤희의 얼굴에는 세월의 고단함과 함께 진한 외로움이 묻어있다. 술을 마시면 윤희를 만나러 오는 전 남편 인호도 마찬가지다. 고모와 함께 사는 쥰도, 쥰에게 치료받은 고양이의 주인 료코도, 모두 외로운 사람들이다. 긴 하루를 보내고 온 쥰에게 고모는 양팔을 벌린다. 뭐야, 왜. 어색하지만 곧 서로를 안는 두 사람. 서로의 온기는 예상하지 못했던 마음의 위로를 준다. 울컥, 눈물이 흐르는 쥰. 쥰의 방에는 교복을 입고 환하게 웃는 쥰의 사진이 걸려있다.
새봄의 카메라
새봄은 엄마 윤희와 단 둘이 산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서 엄마의 오래된 필름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 언젠가 삼촌이 묻는다. 왜 사람을 찍지 않고 풍경만 찍느냐고. 새봄은 자긴 아름다운 것만 찍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새봄은 엄마 아빠가 이혼할 때 엄마와 사는 것을 선택했다. 이유는 엄마가 아빠보다 더 외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엄마가 혼자 잘 살지 못할 거 같아서 엄마를 선택했던 새봄은 엄마 앞으로 온 편지를 몰래 읽고 혹시 자신이 짐은 아니었을까 고민한다.
엄마에게 온 편지의 주소로 여행을 제안한 새봄은 엄마와 여행을 하면서 엄마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다. 살갑지 않았던 엄마가 감추어야 했던 것, 숨기고 살아야 했던 것들을 이해하게 되면서 두 사람의 거리는 가까워지고 밖을 향했던 새봄의 카메라는 엄마 '윤희'를 향한다.
사실 그 카메라는 윤희가 쥰을 찍었던 카메라다. 사랑하는 사람을 찍었던 카메라는 그 사람을 잃고 기능을 상실해버렸다. 그리고 새봄은 고장 난 카메라를 고치고 다시 제 기능을 하도록 만드는 인물이다. 윤희는 삶에 대한 의지와 함께 방치해버렸던 카메라를 들고 이제 새봄을 찍는다.
윤희와 쥰의 재회
외로운 이들을 한결같이 비추는 건 언제나 달이었다. 영화는 초승달이 반달, 보름달이 되는 시간을 견디듯 두 사람의 재회를 기다린다. 오타루, 이른 아침 윤희는 택시를 타고 쥰의 집으로 찾아간다. 하지만 눈 속에 파묻힌 2층 집에서 쥰이 나오자 황급히 자리를 피한다. 쥰을 만나지 않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눈물이 차오르는 윤희. 윤희는 이후 오타루에서 20년 전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보낸다. 피했던 것들을 바로 보는 시간, 그 시간들이 괴롭더라도 윤희는 아픈 기억들을 꺼내 그리워한다. 그리고 여행 마지막 날. 마침내 만월이 뜨고 두 사람은 재회한다. 마주 보는 두 사람의 눈에는 오랜 세월의 그리움과 외로움이 담겨있다. 눈물이 고이지만 서로를 보고 웃는다. 숨어서 지켜보던 새봄은 뒤돌아 걸어 나와 하늘을 본다. 눈이 오는 거리를 나란히 걷는 윤희와 쥰. 그리움이 흩날리는 밤.
윤희의 편지
새봄의 졸업식. 카메라를 들고 새봄과 경수의 사진을 찍는 윤희.
쥰에게. 잘 지내니?
윤희는 쥰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정신병원에 다녀야 했다. 오빠가 소개해 준 남자와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고, 오빠가 소개해 준 곳에서 일을 했다. 여행 중 손목을 주무르는 윤희에게 새봄은 병원에 가보라고 한다. 윤희는 자신의 손목이 아픈 것도 의식하지 못한다. 너무 오래되고 익숙해서 치료하려는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상처.
그리고 윤희는 윤희와 윤희의 사랑을 비정상으로 규정했던 것들로부터 이별한다.
윤희와 새봄은 서울로 이사한다. "나도 더 이상 내가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어. 우리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남은 인생을 버리려 했고 스스로에게 벌을 주며 산 윤희가 자신을 긍정하는 순간 윤희는 강요된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미래를 이야기하고 새로운 삶을 꿈꾸는 윤희. 그리고 딸의 이름처럼 맞이하는 인생의 새 봄을 기다린다.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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