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드라마, 로맨스
감독: 마이크 니콜스
출연: 나탈리 포트만, 주드 로, 줄리아 로버츠, 클라이브 오웬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에는 데미안 라이스의 'The Blower's Daughter'가 흘러나온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 나와 눈이 마주치고 웃는 한 사람. "Hello, stranger." 댄과 앨리스가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는 오프닝과 댄이 앨리스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는 엔딩은 이 노래로 호응한다. 끊임없이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데미안 라이스의 목소리는 어쩐지 쓸쓸하고 공허하게만 느껴진다.
두 여자와, 두 남자
두 여자, 앨리스와 안나: 앨리스와 안나의 첫 만남은 카메라 렌즈 앞에서 이루어진다. 앨리스는 댄이 아닌 안나의 앞에서 그녀의 진심을 노출한다. 앨리스는 안나의 사진전이 사기극이라고 말하는 여자다. 바람둥이 댄에 대한 지속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을 보여주지만 자신을 위장하고 있다. 앨리스는 어떤 사람일까. 사진전에 걸린 앨리스의 얼굴이 압도적으로 아름다워 보였던 건 앨리스의 말처럼 슬픔을 아름답게 포장한 거짓의 힘이었을까? 어쩌면 거짓 뒤에 숨겨진, 댄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앨리스의 진실한 얼굴 때문은 아니었을까. 영화는 앨리스의 말을 통해 사랑의 공허함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앨리스의 얼굴을 통해 사랑의 진실을 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안나에게 정신이 팔린 댄은 그런 앨리스의 표정 따윈 안중에도 없었겠지만.
안나는 앨리스와 조금 다른 사람이다. 당돌하고 직설적인 앨리스와는 달리 성숙하고 집착하지 않는 안나에게 댄은 미친 듯이 빠져든다. 안나는 카메라를 든 관찰자다. 사람들의 표정에서 삶의 희로애락을 포착하고 순간을 박제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사랑 앞에선 우유부단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린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기보단 카메라 뒤에만 숨어있던 안나는 결국 사랑하지 않는 래리에게로 돌아간다.
두 남자, 댄과 래리: 댄과 래리는 익명의 음란 채팅방에서 처음 만난다. 영화 내내 끊임없이 진실을 요구하는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익명 사이트라는 사실은 진실이 공허하다는 주장에 힘을 싣는다.
댄은 부드럽고 섬세한 남자지만 새로운 사랑을 끊임없이 갈구한다. 그가 남발하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흔하고 공허하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하는 그에게 사랑이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수단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사랑한다는 말속엔 몇 퍼센트의 진실이 담겨 있을까.
래리는 본능에 충실하고 단순하지만 의외로 교활한 부분이 있는 사람이다. 안나에 대한 집착은 댄을 향한 질투와 경쟁, 더 나아가 복수심으로 발전하고 네 사람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잡는다. 채팅방에서 댄에게 속음으로써 이 복잡한 관계 속으로 얽혀 들어왔던 래리는 결국 댄의 사랑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데에 성공한다.
사랑의 시작
소설가가 꿈이었던 런던의 부고담당 기자 댄은 출근길에 교통사고가 난 앨리스를 도와준다. 댄은 여자 친구가 있지만 운명 같은 앨리스와 사랑에 빠진다. 앨리스는 뉴욕에서 온 스트립댄서다. 댄은 앨리스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출간에 성공한다. 출간할 책의 프로필 사진을 찍으러 스튜디오에 방문한 댄은 사진작가 안나에게 첫눈에 반한다. 안나는 '낯선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전시회를 준비 중이다. 댄과 안나는 앨리스가 모델인 소설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첫 만남에 키스를 할 만큼 서로에게 빠져들지만 앨리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던 안나는 댄의 구애를 거절한다. 안나의 작업실을 찾아온 앨리스는 댄과 안나의 미묘한 기류를 눈치챈다. 댄이 나간 후 안나와 댄의 이야기를 하던 앨리스는 눈물을 흘리고, 안나는 그런 앨리스의 얼굴을 사진에 담는다.
댄은 익명 채팅방에서 안나라는 이름으로 래리라는 남자와 성에 대한 노골적인 잡담을 나누고 다음날 수족관에서 만나기로 한다. 래리는 안나의 인상착의를 보고 어젯밤 나눴던 야한 표현들을 쓰며 말을 걸지만 안나의 반응에 당황한다. 댄이 벌인 일이라는 걸 눈치챈 안나는 래리에게 상황설명을 하고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가까워진다.
안나의 사진 전시회에 가는 댄과 앨리스. 전시회 한쪽 벽면 가득히 앨리스의 슬픈 얼굴이 전시되어 있다. 담배를 피우며 사진을 보고 있는 앨리스에게 래리가 말을 건다. 래리는 안나와 연애 중이다. 사진이 어떠냐는 래리의 질문에 앨리스는 진실은 없다고 답한다. 사진 속 인물들은 외롭고 슬프지만 사진은 세상을 아름답게 왜곡한다. 사람들은 거짓에 열광하고 사진 속에 진실은 없다.
안나와 대화하던 댄은 자신이 안나라는 이름으로 채팅했던 남자가 안나의 남자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전시회를 나온 댄과 앨리스, 앨리스가 탄 택시가 멀어지자 댄은 다시 안나가 있는 전시회장으로 들어간다. 래리는 안나와 이야기하는 댄이 신경 쓰인다. 댄은 집요하게 안나의 사랑을 갈구하고 갈등하는 안나. 신경이 날카로워진 래리와 안나는 날 선 대화를 나누다가 화해한다.
사랑의 끝
어느날 댄은 앨리스에게 안나의 전시회가 열렸던 1년 전부터 안나와 만나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앨리스는 배신감을 느끼고 댄을 떠난다. 같은 시간, 래리와 결혼한 안나는 뉴욕 출장에서 돌아온 래리에게 댄을 사랑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상처를 받은 래리는 스트립 클럽에서 우연히 앨리스를 만난다. 앨리스는 제인이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이다. 래리는 앨리스의 진짜 이름을 묻고 앨리스는 제인이라고 대답한다. 래리는 앨리스의 말을 믿지 않고 강압적으로 진짜 이름을 추궁하지만 앨리스는 제인이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4개월 후 래리와 안나는 이혼한다. 래리는 이혼을 조건으로 잠자리를 제안하고 받아들이는 안나. 댄은 사실을 알고 혼란스럽다. 안나는 아무 의미가 없는 잠자리였다고 댄을 설득하지만 댄은 래리가 자신을 조롱했다며 화를 내고 이별을 선언한다. 비가 오는 날 래리의 병원으로 찾아간 댄, 안나를 돌려달라고 애원한다. 안나는 래리에게 돌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래리는 우는 댄에게 앨리스가 일하는 곳을 알려주고 자신이 앨리스와 잤다는 말을 덧붙인다.
호텔. 재회한 댄과 앨리스는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댄은 엘리스가 진짜 래리와 잤는지 궁금하다. 진실 말하기를 거부하는 앨리스에게 진실 없인 그저 짐승에 지나지 않는다는 댄.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고, 진실을 말할 수도 없는 앨리스는 댄에 대한 사랑을 끝낸다.
댄을 떠나 혼자 뉴욕으로 떠나는 앨리스. 앨리스의 여권 속 본명은 제인이다. 앨리스와 처음 만난 날 함께 들렀던 추모공원에 오는 댄. 죽은 사람들의 비문에서 앨리스라는 이름을 발견한다.
사랑이라는 공허한 말
니콜스는 "우리는 사랑의 처음과 끝만을 기억하고 그 중간은 편집해버린다. 거기에서 흥미로운 질문이 생겨난다. 우리는 사물을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는가, 삶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치는가"라는 말로 클로저를 설명했다. 실제로 클로저는 앨리스와 댄, 안나와 래리 이 네 사람의 시작과 끝이 묘사될 뿐이다. 이들이 얼마나 사랑했고 얼마나 행복했는지는 점프해버리는 영화 속 시간처럼 가볍다.
안나의 사진전 시퀀스는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전시회장 가득히 얼굴을 노출하고 있는 사진 속 타인들. 그 정적인 공간 사이에서 교차하는 네 사람의 시선에는 진실, 거짓, 욕망, 배신, 질투 등이 흘러다닌다. 앨리스의 사진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댄이 아닌 래리인 것도 재밌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 앞에서 종종 진실을 드러내는 앨리스와, 댄을 사랑하기 때문에 진실을 숨기고 싶었던 앨리스. 댄은 앨리스가 떠난 후에야 앨리스의 진짜 이름이 앨리스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앨리스가 댄과의 사랑을 끝낸 이유는, 댄이 요구했던 한없이 가벼운 '진실' 때문이 아니라 댄이 '진짜 앨리스의 이름'을 궁금해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질식해버릴 만큼 널린 사랑, 사랑과 진실은 언제나 같은 의미일 수 없고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은 실체가 없다.
많지 않은 대사들은 사랑에 대한 씁쓸한 시처럼 느껴진다. 무엇보다 네 사람의 주인공들은 주고 받는 시선과 표정을 통해 명쾌하게 정의할 수 없는 사랑과 진실의 미묘한 전이를 표현했다. 엔딩에서 흘러나오는 데미안 라이스의 목소리는 2시간 동안 식었던 차가운 한숨을 토하게 한다. 클로저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감전된 듯 저릿해진 마음으로 사랑과 진실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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