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드라마, 음악
감독: 쥬세페 토르나토레
출연: 팀 로스, 브루이트 테일러 빈스, 멜라니 티에리
피아니스트의 전설은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회에 가기 위해서 봤던 영화다. 공개된 음악회의 프로그램에는 <시네마 천국>이나 <러브 어페어>, <미션>의 'Gabriel's Oboe'와 같은 유명한 곡들도 있었지만 'Playing Love'와 같은 곡들은 생소했다. 나는 피아노곡을 굉장히 좋아한다. 음원으로 들은 'Playing Love'는 듣자마자 사랑에 빠질 만큼 너무 좋았고, 피아니스트의 전설 OST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피아니스트가 주인공인 이 영화를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1900의 전설
트럼펫 연주자 맥스 튜니는 중고 악기상에 자신의 악기를 팔기 직전 마지막으로 트럼펫을 연주한다. 맥스의 연주를 들은 악기상 주인은 이 음악이 자신이 발견한 깨진 레코드 속의 피아노 연주곡과 같은 음악이라는 것을 깨닫고 맥스 튜니에게 레코드 속의 피아니스트에 대해 묻는다. 맥스는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던, 자신의 기억 속 천재 피아니스트 나인틴 헌드레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1900년 새해 첫 달, 버지니아 호의 탄부 데니 부드맨은 1등석 피아노 위에 버려진 아기를 발견하고 이름을 나인틴 헌드레드라고 지어준다.
24살이었던 맥스 튜니는 버지니아 호에 악사로 지원하여 배에 오른다. 버지니아 호는 아메리카와 유럽을 오가는 호화 유람선이다. 맥스는 그곳에서 27살이 될 때까지 한 번도 육지를 밟아본 적이 없는 피아노 천재 나인틴 헌드레드를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친구가 되어 함께 연주하고 우정을 쌓는다.
나인틴 헌드레드는 부유한 1등석의 승객들 뿐만 아니라 3등석의 이민자들을 위해서도 피아노를 연주한다. 이민자들은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향한다. 그는 매일 아름다운 도시를 상상하고 여행하는 꿈을 꾸지만 이민자들처럼 그 꿈을 향해 달려가지 않는다. 모두가 떠나고 혼자 남은 배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맥스는 나인틴 헌드레드에게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배를 내려갈 것을 권유하지만 그는 결국 버지니아 호에 남는다.
인상적인 피아노 연주 장면들
폭풍우를 만난 버지니아호는 사정없이 흔들린다. 배멀미로 힘들어하는 맥스를 본 나인틴 헌드레드는 피아노의 고정쇠를 제거하고 맥스를 옆에 앉힌다. 피아노는 흔들리는 배를 따라 춤을 추듯 미끄러지고 이때 연주하는 음악이 'Magic Waltz'다. 거친 파도를 탄 경쾌하고 우아한 선율은 나인틴 헌드레드의 인생을 은유하는 듯하다.
피아노를 리코딩하던 나인틴 헌드레드는 우연히 갑판 위에 서있는 한 여자를 보고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고 그 감정을 즉흥적으로 연주한다. 따뜻하고 서정적인 사랑의 선율이 흐르는 'Playing Love'는 유일하게 리코딩된 나인틴 헌드레드의 곡으로 영화의 발단이 되는 곡이자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곡이다.
어느 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재즈의 창시자인 젤리 롤 모튼이 나인틴 헌드레드와 피아노 대결을 벌이기 위해 찾아온다. 모튼이 연주하는 'The Crave'를 듣고 나인틴 헌드레드는 눈물을 흘린다. 그는 애초에 대결에 이길 마음이 없다. 그에게 음악은 대결이라던가 승리를 위한 도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튼이 마지막 대결에서 자신의 기교를 과시하며 도발해오자 나인틴 헌드레드는 그의 오만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Enduring Movement'에서 극강의 기교를 선보인다.
1900은 왜 배를 떠나지 않았을까
<시네마 천국>의 토토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왔지만 나인틴 헌드레드는 좁은 자신의 세계에 머무는 것을 선택했다. 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Playing Love'를 연주했던 것처럼 더 넓은 세계는 나인틴 헌드레드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었을 텐데. 나인틴 헌드레드는 맥스에게 말했다. 피아노 건반은 시작과 끝이 있다고. 88개의 건반으로 만드는 음악은 무한하다고. 하지만 육지는 수백만 개의 건반이 존재하는 세계다. 나인틴 헌드레드는 수백만 개의 건반으로는 연주를 할 수 없다고 말한다.
피아노는 좀 더 개인의 예술에 가깝다. 종합예술인 영화와 달리 피아노와 '나'의 관계는 직관적이며 내가 두드리면 반응하는 소통의 방향도 일정하다. 그는 자신이 직접 연주하는 게 아닌 레코드가 재생하는 자신의 음악을 거부한다. 그래서 나인틴 헌드레드는 곧 예술의 순수성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수없이 육지 사이를 오고 갔던 버지니아 호에는 그의 음악, 그의 연주가 존재했고 그의 피아노를 사랑하고 환호했던 사람들의 시간도 존재한다. 기록되고 기억되지 못했어도 그 수많은 순간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기록되고 재생됨으로써 감동을 주었던 <시네마 천국>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름 없는 예술가들, 곧 나인틴 헌드레드들을 보듬는다. 그들이 부딪혀야 했던 각자의 딜레마와 그럼에도 아름다웠던 예술을 향한 순정이 나인틴 헌드레드의 선택 속에서 드러난다. 맥스가 나인틴 헌드레드의 선택을 이해하고 다시 자신의 트럼펫을 되찾는 장면은 영화의 나인틴 헌드레드들에 대한 지지와 응원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은 정말 아름답고 서정적이다. 여기에 시네마 천국을 만들었던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낭만적인 향수는 역시 이 영화의 주된 정서를 만들고 있다. 예술에 대한 경외와 모든 지나간 것에 대한 소중함과 그리움. 그리고 기록되지 않은 예술가들에 대한 순정은 유한해서 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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