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드라마
감독: 레오스 카락스
출연: 드니 라방, 에바 멘데스, 카일리 미노그, 에디뜨 스꼽
오래된 극장에서 처음 본 홀리모터스
홀리모터스를 처음 알게 된 건 이 영화가 매체로써의 '영화'의 매력을 대표하고 있다는 어느 영화 커뮤니티의 댓글에서였다. 어떤 끌림에서였는지 나는 홀리모터스를 꼭 보고 싶었다. 2013년 당시, 홀리모터스는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오래된 독립영화관에서만 상영하고 있었다. 관심이 없다면 누구도 그 자리에, 그것도 유동인구가 아주 많은 대도시의 번화가에 그런 낡은 영화관이 있었다는 걸 몰랐을 것이다. 극장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는 낡고 좁은 계단에서는 찌든 냄새가 났다. 그곳엔 티켓을 발행해주는 직원과 고양이 한 마리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상영관은 작았고 연극무대처럼 빨간색 커튼이 쳐져 있었다. 스크린이 켜지고 영화는 거짓말처럼 영화관을 비추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잠에서 깬 남자가 침대에서 내려와 벽에 난 문을 열고 어디론가 들어선다.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어두운 극장 안, 시체처럼 빽빽이 앉아있는 관객들 위로 타이틀이 떠오른다. 홀리모터스. 인생과 영화는 이처럼 죽은 이들의 시선 안에서 시작된다.
다시 본 홀리모터스, 그리고 영화 이야기
성공한 사업가인 오스카는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출근길에 오른다. 비서로부터 오늘 스케줄을 받아 든 오스카는 곧 거울 앞에서 가발을 꺼내 빗질을 한다. 홀리모터스는 오스카라는 남자가 아침에 출근을 해서 리무진을 타고 하루종일 프랑스 파리를 돌아다니면서 그 날 예정되어 있는 배역들을 차례로 연기하는 하루의 일과를 다룬 이야기다. 영화는 기승전결이 명확하거나 일관적인 영화의 톤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굉장히 난해하고 불친절하다. 하지만 '영화적 체험'으로써의 홀리모터스는 어떤가. 이 영화는 영화라는 매체가 취할 수 있는 모든 장르적인 것들을 탐하고 있는데, 이는 어쩌면 이 영화에서 스토리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음 컷과 다음 씬, 그리고 다음 시퀀스에 대한 기대는 반드시 스토리에만 기반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개성과 에너지는 그 자체로 특별하고, 홀리모터스는 단일한 스토리의 완성을 추구하기보다는 영화만이 구현해 낼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들을 예찬하며 풀어놓는다. 압도적인 미장센과 기이하고 예측할 수 없는 장면 전환, 여기에 홀리모터스의 '영화적 체험'이 있다.
오스카가 연기하는 아홉 개의 삶. 그리고 그 삶을 표현하는 아홉 개의 스타일. 오스카는 걸인, 모션 캡처 배우, 광인, 자상한 아버지, 악사, 암살자, 죽어가는 노인 등을 연기하면서 드라마, 액션, SF, 누아르, 멜로, 뮤지컬 등등의 장르를 넘나든다. 이런 에피소드들을 통해 레오스 카락스는 초기 무성영화의 매혹과 향수, 현대 디지털영화에 대한 탄식이라던지 리무진을 향한 부정적 감정이라던지 혹은 사랑하는 연인을 잃었던 감독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녹이기도 했다. 오스카의 차 문이 열릴 때마다 따라붙는 질문들은 다음 에피소드에서 해소되기도, 혹은 증폭되기도 하면서 홀리모터스는 끝없이 파리를 누빈다. 영화와 삶을 향한 외로운 질주. 그렇다. 오스카의 9개 삶. 아니, 11개의 삶. 이건 현실이기도 하고 환상이기도 하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한 삶. 그래서 미치게 아름답고 미치게 끔찍한 삶. 그의 하루를 곰곰이 되짚어봐도 현실과 연기의 경계를 정확히 구분해 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삶이 영화고 영화가 곧 삶인 셈이다. 여기에서 나는 좀비처럼 앉아있던 오프닝 씬의 관객들이 생각났다. 죽어있는 극장 속 사람들과 생동하는 고전영화의 대비 그리고 낡은 영화관에서 홀리모터스를 처음 봤던 그 순간의 내가.
오래된 극장에서 홀리모터스를 본 일은 영화를 본 직후의 조금은 혼란스럽고 이상했던 기분과 더불어 독특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홀리모터스를 옛날 영화관에서 본 것은 어쩌면 운명같은 일이었다. 너무 섬세해서 끔찍하고, 너무 적나라해서 아름다웠던 드니 라방의 연기. 영화와 삶의 경계를 무너뜨린 채 거울 앞에 선 레오스 까락스. 그리고 영화를 봤던 오래된 극장까지도 영화의 일부분으로 만들어버리는 미치도록 환상적인 홀리모터스의 세계. 여기 이보다 더 아름다운 영화에 대한 찬사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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